이전 미술 전문 블로그(티스토리 폭파)에서도 포스팅 했었지만 지난 5월 초 사회 생활 처음으로 커밍아웃을 했던 형이 있다.내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공개하고 그 모양대로 살겠다는 게 죄가 될 순 없는데,모든 게이들이 공감하듯 커밍아웃은 수만 번 망설이고 고민끝에 그야말로 큰 죄를 지은 죄인마냥 고개를 숙이고 착찹한 심정으로 극도의 긴장과 불안정한 떨림속에 상대에게 마음속에 깊이 묻어두었던 감춰진 성 정체성을 꺼낸다.
평소에 존경하는 형에게 커밍아웃을 했던 나역시 그랬다.잘못하면 혐오감을 줄 수 있고 기나긴 시간동안 쌓아왔던 친분 관계가 하루 아침에 멀어지는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한다.그런데도 난 했다.가만히 있어도 그 친분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하고 잘 살텐데 말이다.
그러면 난 왜 커밍아웃을 한 걸까? 간단하다. 솔직하게 살고 싶어서,행복하게 살고 싶어서,나 자신을 사랑해주고 싶어서였다.그러나 아직은 부모님 및 가족(남동생만 알고 있다)과 그외 꽤 친분있는 지인들에게 하고 싶지 않다.커밍아웃후에 벌어지는 톡톡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홀로 견딜 수 있는 자신이 생겼을 때 하려고 한다.
커밍아웃한 이후 형은 나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주었고,친분 관계는 그전보다 더 돈독해졌다.그 형은 예전에도 언급했지만 블로그 이웃인 부에노님이 그랬던가...자유로운 영혼과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과 정신 세계를 유지하며,대화가 즐겁고,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세련된 매너와 이해심이 많으며,신뢰할 수 있는 분이다.
그리고 디자인과 내가 좋아하는 예술 전반에 관한 폭넓은 대화가 가능하고,인문학, 사회과학,철학, 심리학,정치,경제 등 심지어는 수리학(數理學),역술(易術),역학(易學)에도 밝은.그리고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바른 생활인이다.한마디로 정의로운 사람이다.더욱이 외모도 길게 땋아내린 머리와 흰색 고무신과 무명 한복을 자주 입는 형은 영락없는 도인이다.그래서 난 형 별명을 제갈공명을 줄여서 제갈형이라고 부른다.
그런데,제갈형이 어느날 사람들을 적잖이 당황하게 만드는 대형 사고를 쳤다.다름 아닌 그래피티 아트(graffiti art)다.미술의 한 종류인 일명 길거리 낙서 예술.이 아트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음악,시,춤 그리고 그림이 공존하는 이상적인 문화이다.서울의 홍대에서 흔히 볼 수 있음직한 역동적인 그래피티 아트는 아니지만 제갈형이 추구하는 사회정의와 환경적 이상을 담았다.전라남도 나주시에서 목포시 방면으로 가는 어느 한적한 국도의 시골 주유소 담벼락에...!!
(*아래의 사진 8장은 완성된 후 핸펀으로 찍음.화질이 선명치 못하다.클릭하면 크게 나온다.600~900px)
추석전에 안부 인사를 할려고 전화 통화중에 주유소 벽에 그림을 그린다고 들었을 때 난 의아했고 한편으론 그다지 기대는 하지 않았다.왜냐하면 형이 나처럼 미술 작품을 보는 건 좋아하는데 시간만 나면 갤러리를 찾는 나만큼은 아니었고,실제 그리는 건 보지 못했고 또한 그린다 하여도 이렇게까지 재주가 있을줄은 전혀 예상을 못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이게 웬걸...추석 후 주유소에서 벽화 그림을 처음 접한 순간 난 입이 떡 벌어져서 다물줄 몰랐다.도대체 제갈형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마지막으로 제갈형이 주유소 건물 벽면에 완성한 일월오봉도다.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는 조선 궁궐의 용상 뒤에 쳤던 병풍의 그림이다.잘 알려져 있듯 우주의 중심인 해와 달, 오악사상 반영인
다섯개의 봉우리, 소나무, 폭포, 파도 무늬를 그렸다.원래 ‘일월오봉도’는 조선시대 국가 공식 의식이 치러지고, 왕이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경복궁 근정전에 있던 그림이다.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 그림은 매우 장엄한 느낌을 주며, 임금이 통치하는 삼라만상과 영원한 생명력을 상징한다.이 소재들은 매우 도식화된 모습으로 병풍마다 별 차이 없이 나타나는데,이것은 궁중화가들이 전통적인 본(本) 을 따라 그렸기 때문이다.현재 약20여 개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조선의 왕은 반드시 이 병풍 앞에 앉는다고 한다.이건 우리나라만의 특징. 멀리 행차를 할 때도,
죽어서 관 속에 누워도, 심지어 초상화 뒤에도 '일월오봉도'는 놓인다고 한다.최근 2007년도부터 사용된 신권 만원짜리 세종대왕 초상
뒤 도안이 일월오봉도로 바뀐 것은 어쩌면 좀 더 자연스런 모습인지도 모른다.
이 그림이 주는 숨은 속 뜻은 왕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하늘의 이치를 받들고 인의예지신을 갖추어 부지런하게 만백성의 아버지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또한 이렇게 좋은 정치를 펼치면 폭포처럼 생명의 기운이 고루 퍼져 온 세상이 풍요로울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제갈형은 왜 일월오봉도를 그릴 생각을 하였을까? 형은 이 그림을 경복궁 근정전에서 몇 번 봤다고 한다.형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현 정권의 대통령인 이명박이 만백성의 아버지 역활을 제대로 못해주고 좋은 정치를 펼치지 못함에 개탄스러워 세상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줄려고 그렸던 건 아닐까 하고 나름 생각한다.
지난주에 제갈형 집에서 형이랑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눴다.그때도 벽화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형이 문득 작업중에 찍어간 사진을 혹시 내 미술 블로그에 올리지 않았냐고 나에게 물어봤다.아직 올리지 않았다고 했다.그리고 예전 미술 블로그는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폐쇄를 하고 다른 곳(텍스트큐브)으로 이전하였고,형의 얼굴과 벽화 사진들을 올리면 내 자신 스스로 아웃팅을 해버리는 격이 되버려 고민중이라고 했다.
그런 나를 보고 제갈형이 웃으면서 한마디 하였다.
"네 블로그에 만일 내 얼굴이 올라가면 나도 게이인줄 사람들이 오해하는 거 아니니..? 그렇게 되면 내가 아는 누군가(게이)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지 않을까..하하하 난 상관 없는데 혹시 너에 대해 알려지면 사업하는데 지장이 생길 수 있으니까 그냥 올리지 마렴."
"형 아니에요,익명으로 쓰는 블로그니까 솔직히 누가 알겠어요.저도 괜찮아요.걱정 마세요,그리고 아름다운 건 널리 널리 퍼뜨려야 해요,근데 새 블로그 오픈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방문자수가 많지 않으니 그게 문제죠."
하여 작업중인 제갈형의 모습을 아예 대놓고 포스팅을 하게 되었다.사진 속에 나와 있는 제갈형 완전 멋지지 않나요? 혹 게이분들 침 흘리지 마세요.이 분은 100% 이성애자랍니다.^^ 참 제갈형은 미혼이다.그런데 아직은 결혼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한다.자유로운 영혼이라 그 누구에게 구속을 받고 싶지 않다고 하는데,내가 생각할 땐 뻥이다.^^; 아마도 형이 생각하는 인연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렇게 돌려서 말할지도 모른다.
내가 처음 갔을적엔 제갈형은 공해에 찌들지 않은 녹색의 도시와 때묻지 않는 농촌의 녹색 들판.노랑,초록,빨강을 이용해서 사계절을 표현한 산과 나무.그리고 시원함을 느끼는 한 낮의 코발트블루 바다,하얀 뭉게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듯한 높다랗고 맑은 파아란 하늘 등 움직임이 없고 시간마저 정지 되어있는 느낌을 주는 정적인 공간만을 캔버스 즉 '벽'에 담고 있었다.
형이 나의 생각을 물었다.그래서 평화스럽고 달콤한 정적인 공간도 좋은데 대비되는 동적인 움직임이 없어 생동감과 역동감이 떨어져
좀 횡한 느낌이 들고 뭔가 허전하니 동물이나 사람을 그려 포인트를 줬으면 한다고 했다.그리고 상식을 뒤엎는 신선한 충격을 줬으면
한다고 이를테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아닌 헤엄치고 걸어다니는 동물이나 사람을 하늘을 날게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아마도 내가
일러스트레이션 카툰 느낌이 나는 만화적인 그림들을 많이 봐와서 그런지 모르겠다.
근데 제갈형이 그냥 무심결에 내뱉은 내 말을 들어줄 줄 몰랐는데,듣자 마자 바로 윗 사진처럼 갈매기로 포인트를 주고,완성된 주유소 입구 벽엔 만화 느낌이 나는 새나 비행기도 그려져 있어서 내 입가엔 함박 미소가 지어졌고 어깨는 절로 으쓱해졌다.위에 올린 사진들이 핸펀으로 찍어 화질이 좋지 않아 흐리게 보여서 감동이 덜한데..조만간 디카라도 찍어서 화질 좋은 사진으로 올리려고 한다.
아름다운 그래피티 작품을 볼 수 있는 곳은 전라남도 나주시에서 목포시 가는 국도변..다시면에 한참 못가서 있는 세 번째 김정현 현대오일뱅크 주유소다.사실 이 주유소가 있는 국도는 광주시 광산구에서 목포시로 가는 고속화 도로가 완공이 되면서 차들이 예전처럼 그리 많지 않다.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주인에게 왜 죽어가는 주유소에 돈을 버리느냐고 반대를 했다고 한다.
나같은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든 아마 엄두를 내지 못할 지도 모른다.그래서 주유소 주인도 제갈형처럼 생각이 깨어있는 비범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나중에 알았지만 두 분이 막역한 친구 사이라고 한다.이 벽화를 3년여 전부터 제갈형하고 의논을 해왔다고 한다.3년 전 당시엔 주유소 공간이 협소해서 인접해 있는 땅을 사서 터를 더 넓힌 다음에 그리자고 해서 지금에 와서야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유럽이나 뉴욕이나 서울의 홍대 뒷 골목이나 압구정 토끼굴에나 볼 수 있음직한 생동감 넘치는 그래피티 아트를 안양과 통영의 허름한 작은 마을에서 보고 전라도 나주의 어느 한적한 시골 주유소에도 볼 수 있다는 게 너무나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사람들에게 밝은 미소를 짓게 하는 아름답고 자유롭고 편안함을 주는 공공의 예술이 더 많이 보아졌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램이다.
또한 동시대적인 게릴라 아티스트로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전설적인 인물
장 미셀 바스키아,
키스 해링.그리고 현재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의 우상인 아트 테러리스트라고도 불리우는 영국의
뱅크시(Banksy)가 표현하는 일탈의 즐거움과 신자유/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문화적인 소재를 그대로 복사해온 듯한 일련의 소재들보다는 우리나라 고유의 소재를 써서 담아낸 벽화가 한국땅에서는 더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