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날라리 해피 게이 라이프 블로그를 찾아주신 여러분 감사했읍니다.
2010년에는 자주 못뵈더라도 종종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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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업 하시는 분들은 돈 많이 버시고
파트너가 없는 분들은 꼭 좋은 인연을 만나시고
모든분들 건강하고 행복한 2010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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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권위있고 전통있는 콩쿨중 하나인 '쇼팽 국제 콩쿨(International Chopin Piano Competition) '1975년 우승자인 폴란드 유명 피아니스트인 크리스티안 짐머만(Krystian Zimerman,1956~ )이 연주한 쇼팽 발라드 1번부터 4번은 지금까지도 이보다 더 마음에 드는 연주를 볼 수 없었다.해서 한껏 추워진 깊은 겨울밤 피로가 확 풀리듯 따스하고 아름다운 곡들을 감상하고 기분좋게 숙면에 취했으면 하는 바램으로 짐머만의 연주곡 동영상들을 차례대로 올려본다.
오늘은 12월 들어서 정말 살을 에이듯 매서운 혹한의 추위가 엄습해왔다.앞으로 더 추워진다고 하니 두툼한 옷으로 온몸을 감싸고 밖에 나서야겠다.그나저나 요즘은 펑퍼짐하고 두툼한 옷보다는 보온성이 좋고 가벼운 오리털 소재로 ‘날씬이’ 패딩 옷이 유행이란다.추워진 날씨에도 킹카족들의 날씬하게 보이고자 하는 노력들이 정말 가상하다.하긴 아침 헬스장에서의 남,녀 몸짱들의 퍠션은 추위엔 전혀 아랑곳 하지않는 '날씬이' 옷들이 대부분이더라.나만 펑퍼짐하고 두툼한 옷으로 무장을 했으니 조금 의식하게 되더라..해서 내일 아침 출근복은 폼나게 입을까도 했는데 감기 걸리면 주말내내 할일이 태산인데 자칫 개고생 할지도 모르기에 생각을 슬그머니 접었다.헐!
짐머만이 연주한 쇼팽 발라드 1번 연주 동영상
짐머만이 연주한 쇼팽 발라드 2번 연주 동영상
짐머만이 연주한 쇼팽 발라드 3번 연주 동영상
짐머만이 연주한 쇼팽 발라드 4-1번 연주 동영상
짐머만이 연주한 쇼팽 발라드 4-2번 연주 동영상
바그너식의 종합적인 예술가의 비전은 아니지만 만능 예술가로서 그 누구에 비해 손색이 없는 장 콕토는 프랑스 문화의 중심적인 인물이다. 친구 피카소의 기법을 도입해 입체감이 넘치도록 이미지를 구성한 시를 쓴 시인이었고,아방가르드 연극인이었으며,자신의 시집에 직접 삽화를 그린 화가였다.뿐만 아니라 조각가이기도 하며 소설가, 영화감독, 문학비평가, 배우 등 그를 쫓는 직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그러나 이중 어느 것도 빠진다면 장 콕토에 대한 정당한 설명이 되지 않을 것이다.(씨네21 영화감독사전 내용 더보기)
<장 콕토 일생을 그린 다큐멘터리 part1>
다큐멘터리 part2~
<장 콕토 일생을 그린 다큐멘터리 part2>
<장 콕토 일생을 그린 다큐멘터리 part3>
어느 사랑의 노래:장 콕토, 장 주네 특별전(2009.12.15~20/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서울아트시네마)
게이였던 그는 신화적 원형에 호모에로티시즘을 채색한 <시인의 피>, <오르페>, <오르페의 유언> 등 ‘시인 3부작’을 통해 시인의 내적인 영감과 창작의 고통을 형상화해 냈으며, 현대 판타지 영화의 원형이라 할 <미녀의 야수>에서는 매혹적인 상상력을 선보였고, 또한 <무서운 부모들> 등의 작품에서는 현대 사회와 인간에 대한 매서운 통찰력을 보여 주었습니다.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를 영상화한 그의 작품들은 프랑스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물론이거니와 마야 데런, 캐너스 앵거를 비롯한 후대의 전위영화 작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도 여전히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도취의 영화, 도발의 예술(글 : 홍성남 (평론가))
<장 콕토 일생을 그린 다큐멘터리 part4>
<장 콕토 일생을 그린 다큐멘터리 part5>
장 콕토, 그의 연인들(친구사이..알자지라)
자신이 게이임을 떳떳하게 공언하고 다닌 콕토이니만큼 그의 곁에는 남자들이 훨씬 더 많았지만, 그의 평생의 연인은 단연 레이몽 라디게, 그리고 마르셀 킬이었다.평생을 예술과 함께 살아온 장 콕토는 연애마저도 다소 드라마틱했으며 그의 삶이 하나의 멋진 향연이자 즐거운 퍼포먼스였음을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장 콕토 일생을 그린 다큐멘터리 part6>
1873년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와 프랑스인 하인 파스파르투는 80일 만에 세계일주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의 상상 속 여행이었을 뿐,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다. 하지만 1936년, 장 콕토와 그의 친구 마르셀 킬은 쥘 베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이 상상의 여행을 실제로 감행했다.
쥘 베른의 고전 명작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모태로, 프랑스의 위대한 시인이자 극작가인 장 콕토가 소설 속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간다. 콕토와 킬은 실제로 이 여행에서 각각 필리어스 포그와 파스파르투 역을 맡고 있다(먼저 이 여행을 제안한 킬은 실제 콕토의 동성애 연인이기도 했다).
무서운 아이들(원제 Les Enfants terribles)(알라딘)
이 소설은 미술·문학·영화·연극에 다재다능한 장콕토가 아편 중독을 치료하기 위하여 17일 동안에 쓴 것이다. 나이 어린 소년기에는 증오와 질투의 뼈져린 고뇌가 있으며, 어른들의 세계와는 또 다른 비극성이 숨겨져 있다. 다만 어린아이들은 명확한 의식없이 사랑과 증오의 행위를 반복하며, 꿈과 현실을 혼돈한다. 이 작품은 이같은 아이들의 포에지의 세계를 그린 것이다.
장 콕토 시 모음(http://www.myinnis.com/library/v3libfw-cocteau.htm)
<장 콕토 일생을 그린 다큐멘터리 part7>
http://en.wikipedia.org/wiki/Jean_Cocteau
세계위키백과대사전(작가소개)
http://www.cocteau-art.com/
장 콕토의 미술 작품 사이트
http://www.jeancocteau.net/index_en.php
장 콕토의 공식 사이트
http://www.imdb.com/name/nm0168413/
장 콕토의 영화 데이타 베이스
http://essonnebalades.free.fr/Cocteau/index.html
장 콕토의 건물 벽화 소개
한국에서도 전시했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 게이 커플 사진 작가 피에르&질
http://www.brightlightsfilm.com/24/pierregilles.html
인권단체 친구사이 웹진:모던보이님의 '피에르&질, 캠프' 글을 참고.
2007 Interview de Pierre et Gilles double je - Galerie nationale du Jeu de Paume, Paris
피에르&질의 작업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
작품 동영상
George Michael - December Song
(I Dreamed of Christmas)
친구사이 갔다가 이쁜님이 올린거 퍼왔네요.
음악도 좋고 영상미도 이쁜데..에휴~
영문가사
Merry Christmas
Merry Christmas
May your every New Year dream come true
Sweet December song
The melody that saved me
On those less than silent nights
When snow would fall upon my bed
White sugar from Jesus
And take me to the day
She could always smile
The Virgin Child would always show, you see
Just to save me
(Just to save me)
There was always Christmas time
To wipe the year away
I guess that morning they’d decided
That the war would have to wait
There was always Christmas time
Jesus came to stay
I could believe in peace on Earth
And I could watch TV all day
So I dreamed of Christmas
Maybe since you’ve gone
I went a little crazy
God knows they can see (the child)
But the snow that falls upon my bed
That loving I needed
Falls every single day
For each and every child
The Virgin smiles for all to see
But you kept her from me
There was always Christmas time
To wipe the year away
I guess that morning they’d decided
That the war would have to wait
There was always Christmas time
Jesus came to stay
I could believe in peace on Earth
And I could watch TV all day
And so I dreamed of Christmas
Yes, I dreamed like you
Merry Christmas
Merry Christmas
May your every New Year dream come true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에 대한 편견에 대해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좋은 글이 있어 펌한다.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고 있던 것들의 뒷면에 드러나지 않는 바뀔 수 없는 진실.동성애자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좀 싫어할 땐 제대로 알고나서 싫어 했으면 좋겠다.그러면 결국 자신들은 오만한 착각속에 빠져 있었다는 걸 알게 될 것임을.(by 여기어디나는누구님)
-내과 의사가 만나는 의료와 사회(im.docblog.kr)-
선천적으로 다리가 없거나 시력이 없는 이를 사회적으로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현대에는 없을 것 같다.또한 피부색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다고 차별해서도 안된다는 것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천부인권설로 그 당위성을 주장하기도 진부할 것 같아서 생략하고 다소 개인적인 시각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잠깐 독일의 나치가 가스실과 생매장, 총살 등의 다양한 기법을 동원하여 사회에서 청소해야 할 대상으로 삼은 집단이 누구인지 살펴 보자.
다들 아시다시피,유대인이 그 중에 포함되어 있었고,다음 집시를 비롯한 소수민족,장애인,동성애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당시에 독일 등지에 흑인이 많이 살았다면 이들 또한 많이 '박멸'되었을 텐데,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기독교적 세계관,성경에서는 동성애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어긋난 자들로 죽임을 당할 대상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는 동양에서도 음양오행에서 음(여)과 양(남)을 벗어난 자,음양오행교의 섭리에서 벗어난 이들 또한 사회적 제거 대상이기는 마찬가지였다.과거에 장애인 또한 하늘의 벌이기 때문에 멸시당하던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어떤 이들은 동성애자의 성폭행 때문에 이는 어쩔 수 없는 사회적 관습이 되었다고도 한다. 정말? 조두순이 동성애자인가?(동성애가 아닌)이성애자의 아동 성폭행이나 여성 성폭행이 얼마나 많은지 그 비율을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남자다움의 상징인 전쟁의 전리품으로 얼마나 많은 아이와 여성을 강간하고 살인하였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아직 인간이 자신의 뇌의 기능을 완전히 밝힌 것은 아니기에 남성 동성애자가 이성애자보다 여성성을 어느 만큼 더 가지고 있는지 정량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많은 관찰들에서 이러한 근거들을 제시하고는 있다.(현재의 과학의 한계를 미신이나 종교로 극복하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리플 달지 않기를 바란다.이건 과학과 인간 지성의 발전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남자의 근육과 체력에 여성성을 가진 이유인지는 모르나,근대 르레상스를 견인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유력한 동성애자로 알려져 있다.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전의 소크라테스 또한 그러하다. 현대의 오스카 와일드 또한 그러하다.(상대적으로 덜 혐오하는 여성 동성애자는 오늘 거론하지 않겠다.)
[묘지에서 시체, 사망한 임산부까지 몰래 해부하고 그 기록을 남겨 현대미술 발전만이 아니라, 현대의학 발전에도 지대한 공을 남긴 다빈치.동성애자란 신고로 재판까지 받았으나 다행히 풀려났고,평생을 여자 없이 혼자 살았다.]
만일 이들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사회적 차별과 매장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자.이 위대한 과학자와 예술가들이 중세의 암흑기였거나,중국이나 조선에 태어났다고 생각해보자. 인류는 엄청난 예술과 문화, 과학적 자산을 지금과 같지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돌려 놓고 생각하면 서양 중세의 암흑기와 음양오행과 유교가 지배한 동양에서 거세되었을 동성애자의 정신적, 물질적 자산들이 너무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람은 누구나 단순히 하나나 둘,셋으로 세상의 모든 사물을 줄 세우기를 좋아 한다. 생존을 위한 진화의 산물의 하나일 것이다.사소한 연관관계를 파악하는 능력이 분명히 생존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하지만,이것이 도를 지나쳐 신념이 되고,종교와 철학이 되어 인간 스스로를 구속하는 단계가 되면서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과 발전을 제약하기에 이르렀다.이것이 과거 수천년의 인류 역사였으며,이것에서 벗어나려는 진화/진보가 바로 서양의 르네상스와 과학혁명이었으며,조선의 실학운동이었다.
중력과 전자기력,양자의 운동이 동서양이 다르지 않으며,민주주의와 복지국가란 근대 인류의 로망이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않다.진화와 생물학이 민족에 따라 다르지 않듯이 의학 또한 그러하다.이렇듯 인류의 보편적 발전에 거스르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각 지역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들(음양 오행에 기반한 것들)이 전통의 가면을 쓰고 우리의 정신을 좀 먹는 것을 보면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확인할 수 없는 루머이기는 하나,명품을 만드는 장인의 많은 수가 남성 동성애자라고 한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함께 가지고 있으니,한 정신에 이 둘이 융화되어 타오르는 끼는 감히 나와 같은 이성애자가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류 전체를 생각하여도 인류의 소중한 정신적 과학적 자산을 창출한 인재들을 구속하여서는 안될 것이다.또한 국가 단위로 생각하여도 이들이 창조하는 명품과 문화예술,그리고 과학적 성과들은 중요한 국부란 것을 유럽의 수많은 문화유산을 보기 위하여 찾는 관광객과 명품소비시장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때문에 저출산율을 고려한다면 동성애를 장려할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죄악시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공존하여 살아가야할 중요한 우리의 이웃이자 친구이며 동반자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출처 포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가능-
그렇게 몇 분의 정적이 흘렀다.이윽고 사촌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렸다.아마도 자신에게 한 입맞춤이 잠꼬대인 걸로 여기고 자는 듯 했다.그래서 안심하고 옆으로 뒤돌아눕고 잠을 청했다.슬슬 잠이 곧 들락말락 할 것 같았다.꿈의 문턱에서 밝은 미소를 띤 친구의 얼굴을 보았다.이내 편안함이 밀려왔다.꿀잠을 잘 것 같았다.
그 찰나에 누군가 나를 깨우고 있었다.
등 뒤 바짝 가까이에 인기척이 느껴진 것이다.사촌이었다.잠과 현실사이의 균열이 깨지면서 깨어났다.다시 돌아눕고 싶었다.돌아눕자 사촌의 얼굴과 내 얼굴이 거의 맞닿았다.사촌이 숨을 들이쉬기라도 하면 그 쪽으로 끌려갈 것 같았다.서로의 입술이 조금의 틈도 없이 닿을 것 같았다.그래도 몸을 뒤척여 그에게서 얼굴을 떼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서 부드러운 온기와 풍겨오는 좋은 향기의 은은한 우유 비누 냄새가 콧 속을 맴돌다 머릿속까지 뒤흔들었다.살며시 눈을 떴다.깜깜했다.새벽 1시가 넘었다.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창가에서 실날같은 빛가닥이 들어왔다.그 빛가닥은 석탄같은 깜깜한 어둠을 몰아내고 은은한 조명을 연출했다.
그 조명덕에 눈을 감은 사촌의 얼굴 실루엣이 보였다.뽀얀 피부의 귀여운 얼굴과 까만 속눈썹.사실 사촌들 중 둘째 동갑내기 사촌은 피부가 뽀얗고 귀여웠다.거기다 동그란 눈망울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천친난만한 웃음을 지을때면 그에게서 웬지 모를 감정적인 끌림과 설레임이 느껴졌다.그러나 그런 느낌들 자체가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에 달리 생각치 않고 곧바로 무시해 버렸다.
그도 그럴것이 학창 시절에서 늘상 접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학교 교육.그리고 읽었던 시,소설,수필,위인전 등 그 어떤 책에서도 심지어는 영화,텔레비젼,라디오에서 보고 들어도 동성애에 대해 지식이나 정보를 접하지도 못했고(혹 영화에서 접한다 하더라도 진지함이 없는 코믹스러움과 과장된 여성스러운 몸짓과 말투로 비쳐져 반감이 일었다)사랑과 섹스는 남자와 여자만이 하는 거라고 학습되어 왔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날 밤은 둘 다 돌처럼 그 자리에서 굳은 듯 아무런 미동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내 심장은 두근거렸고 얼굴까지 화끈거려졌다.그에게서 규칙적인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긴장을 했는지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고 말았다.그때였다.
마치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그의 입술이 나의 입술을 덮어버렸다.그리고 두 팔로 내 목을 끌어 안았다.그리곤 내 입속으로 자기 혀를 쑥 밀어 넣으면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그를 밀쳐내지 않았고 순순히 받아들였다.몇날 몇일을 사막속에서 헤맨 사람처럼 갈증에 겨운 듯 내 입술을 빨아먹기 시작했다.격렬하게.
혀가 얼얼할 정도의 강한 흡인력으로 내 혀를 빨았다.혀와 혀가 부딪치고 입술과 입술이 그리고 입술과 혀가 각각 부딪치며. 빨고. 깨물고. 빙빙 돌리고.어지럽게 뒤헝클어지면서 오묘하고 흥분되고 나를 무한정 기쁨의 나락으로 이끌어간다.
그의 몸이 내 품을 비집고 들어왔다.그런 그를 꽉 잡아끌어 내 품에 가두었다.조금의 틈도 없이.내 몸은 이제 초등학생,중학생때의 왜소한 체격의 몸이 아니었다.키도 자랐고 몸집도 커졌다.어린 탓도 있지만 그는 원체 마른 몸이라 내 품에 쏙 들어왔다.그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의 손은 내 티셔츠와 반바지를 벗기고 자신의 상의와 하의도 벗었다.살과 살이 닿았다.뜨거웠다.격렬한 키스로 급상승했던 호흡이 조금씩 진정되면서 또 다른 쾌감이 몰려왔다.어렸지만 태어나서 처음 여자가 아닌 남자와의 격렬하게 키스를 했고 친구가 아닌 또 다른 남자와 살과 살이 닿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상대는 동갑 남자 사촌이었지만 오히려 그에게서 감정적인 끌림과 성적 욕망이 생겼다.부모님 몰래 친구들과 모여 천둥 번개소리에 깜짝 깜짝 놀라며 봤던 야한 비디오에서의 남녀가 전라의 몸으로 서로의 가장 은밀한 곳을 혀로 정신없이,그와 주고 받았다.둘 다 서툴었다.그런데 왜,그 모습이 내겐 낯설고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예전에 마치 경험을 했던 것처럼 본능적으로.
그렇다고 여자애들과 미팅하고 놀러 다닌다고 해서 그때는 질투심을 비롯 소유하고 싶은 욕망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마찬가지 나 역시 친구들 틈에 끼어 여자애들과 한 두번 미팅을 했으니 말이다.난 여자애를 사귄 적은 없었지만 친구는 여자애랑 잠깐 교제를 했었나 보다.그러다 뭐가 맞지 않았는지 얼마 못가서 헤어졌다.그 후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깨복쟁이 남자 친구들과 어울려 즐겁게 중학생 시절을 보냈다.
조그만한 시골 읍인지라 남중이 한 곳 밖에 없어서 중학교도 역시 같이 다녀 1,2학년엔 같은 반을,3학년만 각기 서로 다른 반에서 학교 생활을 하였으나 우리의 뜨거운 우정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그러나 고등학생 시절은 난 광주로 가고 친구는 시골 읍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다니는 바람에 서로를 보는 날들이 적어져 잠시 소원했지만 그러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몰라도 둘 다 보기좋게 응시한 대학을 낙방하고 재수 시절을 부모님의 배려로 한동안 세 내줬던 시골집에서 같이 공부하게 되면서 다시 가까워졌다.
국민학생 시절부터 서로의 집에 숟가락, 밥그릇 수까지 알 정도로 툭 터놓고 스스럼없이 지내왔기에 서로에 대해서 정말 흉 허물없이 속속들이 잘 안다.그리고 어릴적 여느 친한 친구 사이에 있을 법한 일들은 우리 역시 자연스럽게 겪어왔다.또 누구나 그렇듯 늘 같이 지내는 친한 동성 친구 사이의 스킨쉽은 아주 자연스럽다.(물론 그러지 않는 동성 친구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우린 손잡고 어깨동무는 기본이고 목욕탕에서 등 밀어주며 고추 만지고 깔깔 웃기,서로 안고 잠자기,아무 감정없이 장난스럽게 뽀뽀 하기,더운 여름엔 큰 대야에 물받아 놓고 깔깔거리며 목욕하기,동네에 흐르는 내천에 친구들과 놀러가서 발가벗고 물놀이 하기,그리고 전혀 꺼리낌없이 도색 음란 잡지를 보고 자위 행위도 하는(난 친구 앞이라도 부끄러워서 감히 대놓고 잘하지는 못했지만) 등등 전혀 어색하지 않게 말이다.중학생때까지는 그랬다.하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잘 그러질 못했다.
왜냐하면 고등학생 시절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서로 떨어져 지냈기 때문이었고,그러다보니 시간이 갈수록 애틋한 감정이 생겨 괜히 부끄러워지고 두근거림이 생겨 자연스럽게 감히 먼저 하지 못했다.1학년때는 보고 싶어서 토요일 방과후 어김없이 시골집에 내려가면 친구 얼굴을 꼭 보고 올라가고 또 친구가 광주에 자주 놀러 오기도 하는,그런게 그저 단순한 우정인줄만 알았었다.그러던 고등학생 2학년 겨울 방학때 외숙 부모님댁에서 겪은 전혀 뜻하지 않는 일로 인하여 친구에 대한 나의 감정이 우정 이상이라는 걸 점차 느끼게 되었다.
그 당시 시골촌에서 대도시로 고등학교를 진학하는 건 중학생때 공부도 웬만큼 해야되고 장차 대학교를 더 쉽게 가기 위한 목적이 크다.나역시 그랬다.해서 서울에 가고픈 대학교를 미리 점찍고 대학교도 둘러볼겸 또 외가 친척 사촌들중엔 또래 같은 학년인 사촌도 만날겸 외숙 부모님댁에 난생 처음으로 놀러 갔었다.그 외숙은 어머니의 둘째 오빠다.외숙은 서울에서 자수성가하여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사신다.
그리고 그 외숙 부모님댁엔 남자 사촌만 셋 있다.큰 사촌은 나보다 세살 위 형이고,둘째 사촌은 동갑,막내 사촌 동생은 두 살 아래다.사촌들은 어릴적부터 외가 제사때나 경사때 가끔 봐서 그런지 그리 서먹서먹하지는 않았고 특히 어릴적부터 막내 사촌 동생이 날 많이 따르고 좋아했다.그래서 그런지 가자마자 금방 친해져 막내와 동갑내기 사촌과 같이 가고픈 대학교에도 놀러가고 이곳 저곳을 구경하였다.그리고 그렇게 며칠 즐겁게 지내면서 잠을 잘때면 막내 사촌방에서 그리고 그 다음날은 동갑내기 사촌방에서 자는 등 번갈아 가며 같이 잤다.
그런데 시골 내려가기 마지막 날 밤 동갑내기 사촌과 나 사이에 뜻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다음날이면 며칠 안됐지만 많이 친해진 사촌과 헤어지는 아쉬움에 불을 끄고도 어둠속에서 밤늦게까지 시간 가는줄 모르고 얘기 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잠을 청했다.그런데 잠결에 친구랑 같이 자면서 하던 버릇을 나도 모르게 사촌에게 해버렸다.곤히 자고 있는 사촌 빰에 뽀뽀를 해버린 것이다.순간 아차해서 한쪽 실눈을 뜨고 사촌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그런데 분명 자고 있어야 할 사촌의 눈이 떠지는게 보여서 곧바로 난 곤히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나를 빤히 쳐다보는 사촌의 눈길이 방안 캄캄한 어둠속이라 해도 온몸으로 느껴졌다.